PM이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 이유 - 2년간의 솔직한 기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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PM이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 이유 - 2년간의 솔직한 기록

2022년 3월, 나는 처음으로 정신과 문을 열었다. 새벽 4시에 깨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황발작이 일주일에 3번씩 반복됐고, 스프린트 미팅에서 갑자기 숨이 막혀 화면을 끄고 나간 적이 두 번이었다. 디자이너 출신으로 PM 전환 후 3년차, AI 스타트업에서 3개 프로덕트를 동시에 관리하던 시점이었다.

정신과 의사는 15분 만에 "중등도 불안장애"라고 진단했고, 처방전을 건넸다. 에스시탈로프람 10mg. 나는 그 약을 3일간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쳐다만 봤다.

약을 먹기까지 싸워야 했던 편견들

정신과 약에 대한 내 편견은 구체적이었다. "약에 의존하면 진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", "부작용으로 일을 못하게 되면?", "평생 먹어야 하는 거 아냐?". PM으로서 데이터 기반으로 의사결정한다고 말하면서, 정작 내 건강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두려움으로 판단하고 있었다.

실제 데이터를 찾아봤다:

  • SSRI 계열 항우울제의 효과 발현율: 60-70% (위약 30-40%)
  • 심각한 부작용 발생률: 5% 미만
  • 평균 복용 기간: 6-12개월 (평생이 아니다)
  • 인지 기능 저하: 오히려 불안 감소로 인지 기능 개선 사례가 더 많음

그래도 망설였다. 결정적이었던 건 어느 날 프로덕트 로드맵 리뷰에서 CTO가 던진 질문이었다. "이 우선순위, 정말 데이터 기반으로 정한 거 맞아요? 아니면 불안해서 다 하려는 거예요?".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. 불안이 내 판단력을 갉아먹고 있었다.

첫 4주: 부작용과 싸우기

약을 먹기 시작한 첫 주는 지옥이었다. 오심, 두통, 불면증. 의사가 경고했지만 실제로 겪으니 "역시 약은 독이구나"라는 생각이 들었다. 3일째 되던 날, 약을 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.

하지만 PM으로서 배운 게 있다면, 4주는 지켜봐야 한다는 것. 새로운 기능 출시 후 최소 2주 데이터를 봐야 판단할 수 있듯이, 약도 최소 4주는 복용해야 효과를 판단할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.

실제 기록 (노션에 남긴 것):

  • 1주차: 오심 8/10, 불안 9/10, 업무 집중도 3/10
  • 2주차: 오심 5/10, 불안 7/10, 업무 집중도 5/10
  • 3주차: 오심 2/10, 불안 6/10, 업무 집중도 7/10
  • 4주차: 오심 0/10, 불안 4/10, 업무 집중도 8/10

4주째, 뭔가 달라졌다. 새벽 4시에 깨는 빈도가 주 3회에서 주 1회로 줄었다. 스프린트 플래닝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때 "이것도 해야 하는데, 저것도 해야 하는데"라는 강박적 생각이 덜했다. 불안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, 불안이 나를 지배하지 않았다.

약으로 해결되는 것, 안 되는 것

2년간 복용하며 명확히 알게 된 것: 약은 베이스라인을 올려줄 뿐, 문제를 해결하진 않는다.

약으로 해결된 것:

  • 공황발작 빈도: 주 3회 → 월 1회 미만
  • 수면의 질: 6시간 깬 잠 → 7시간 연속 수면
  • 의사결정 속도: "완벽한 데이터"를 기다리는 강박 감소
  • 피드백 수용: 방어적 태도 → 건설적 수용 가능

약으로 해결 안 된 것:

  • 번아웃의 근본 원인 (과도한 업무량)
  • 팀 커뮤니케이션 문제
  • 커리어 방향성에 대한 고민
  • 완벽주의적 성향 자체

약은 "불안"이라는 증폭기를 줄여줬다. 덕분에 실제 문제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. 6개월 복용 후, 나는 회사에 업무 재분배를 요청했고, 주 1회 심리상담을 시작했다. 약을 먹지 않았다면 이런 결정을 내릴 인지적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.

직장에서 약 먹기: 실천 가이드

1. 복용 타이밍 최적화

  • 나는 저녁 9시에 복용한다. 초기 부작용(졸림)이 수면 시간과 겹치도록.
  • 아침 복용이 맞는 사람도 있다. 2주씩 테스트해보길.

2. 알릴 것인가, 말 것인가

  • 팀 전체에 알릴 필요는 없다.
  • 나는 직속 상사(CPO)에게만 말했다. "컨디션 관리를 위해 약물치료 중"이라고.
  • 결과: 주요 프레젠테이션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 확보.

3. 부작용 대응 플랜

  • 처음 2주는 중요한 발표/결정을 최소화.
  • 오심이 있다면: 아침 회의 전 가벼운 식사 필수.
  • 성기능 부작용(있을 수 있다): 의사와 솔직히 상담. 약물 변경 가능.

4. 효과 모니터링

  • 노션에 간단한 트래커 만들기: 불안도, 수면, 집중도를 5점 척도로.
  • 4주 데이터를 가지고 의사와 상담. "느낌"이 아닌 "데이터"로 이야기.

5. 중단 타이밍

  • 나는 1년 복용 후 감량을 시도했다가 재발해서 다시 시작했다.
  • 현재 2년차, 6개월 후 재시도 계획.
  • 중단은 반드시 의사와 함께. 갑자기 끊으면 금단 증상 심각.

2년 후, 달라진 것들

지금은 에스시탈로프람 5mg을 복용한다 (초기 용량의 절반). 공황발작은 6개월째 없고, 수면은 안정적이다. 더 중요한 건, 불안을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.

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: 정신건강도 프로덕트처럼 "관리"할 수 있다. 데이터를 보고, 가설을 세우고, 실험하고, 개선한다. 약은 그 과정의 한 도구일 뿐이다.

PM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판단력이다. 불안이 그 판단력을 갉아먹고 있다면, 약은 "의존"이 아니라 "투자"다. 안경을 쓰는 게 눈에 의존하는 게 아니듯이.

당신이 지금 망설이고 있다면

정신과 약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여전하다. 특히 스타트업 씬에서는 "강인함"이 미덕처럼 여겨진다. 하지만 강인함은 도움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,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할 수 있는 용기다.

시작하기 전 체크리스트:

  • 최소 2주 이상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가?
  • 수면, 식욕, 집중력 중 2개 이상 문제가 있는가?
  • 불안/우울이 업무 판단력에 영향을 주는가?
  • 술, 카페인 등으로 "셀프 치료" 중인가?

3개 이상이면 정신과 방문을 권한다. 첫 방문은 무섭다. 나도 그랬다. 하지만 가장 후회하는 건 더 일찍 가지 않은 것이다.


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,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에게 조용히 공유해주길. 정신건강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, 우리 모두의 문제니까.

그리고 당신이 지금 약을 먹고 있다면: 잘하고 있다. 정말로.